작곡가 이야기/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삶과 음악: 그의 대표 작품과 비하인드 스토리 - 1편

ViolinClass 2024. 9. 11. 02:02

차이콥스키

차이콥스키(Tchaikovsky, Pyotri Il'ych, 출생: 1840년 4월 25일 캄스코-보트킨스크, 비아트카 지방; 사망: 1893년 10월 25일 상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최초의 새로운 유형의 작곡가로, 서유럽의 교향악적 전통을 완전히 흡수한 전문적인 작곡가였다. 그가 보여준 음악적 깊이는 독창적이고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국가적인 스타일을 갖추며 베토벤과 슈만의 교향악적 사고를 글린카의 작품과 결합시켰다. 또한, 리스트와 베를리오즈의 묘사적이고 표제적인 음악의 성과를 셰익스피어적인 고양감과 심리적 중요성으로 변모시킨 러시아 최초의 새로운 유형의 작곡가이다.

 

1893년 차이콥스키의 명성이 가장 찬란했던 시기의 사진. [출처: 차이콥스키 리서치]
1893년 차이콥스키의 명성이 가장 찬란했던 시기의 사진. [출처: 차이콥스키 리서치]

 

차이콥스키의 어린 시절

차이콥스키는 러시아에서 태어난 광산 기술자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둘째 아들이었다. 가족 중에서도 특히 거의 여동생 사샤(Sasha)라고 불리던 알렉산드라(Aleksandra, 1842-91, 결혼 이후 다비도바(Davïdova)로 성이 바뀜.)와 쌍둥이 남동생인 아나톨리(Anatoly, 1850-1915), 그리고 작가가 된 모데스크(Mosest, 1850-1916)가 그의 삶에서 큰 역할을 했다. 모데스트는 나중에 형인 차이콥스키의 전기를 썼는데, 이 책은 형제의 특별한 유대감이 느껴지는 중요한 자료로 남아있다.

 

차이콥스키의 어린 시절은 그의 가정교사였던 패니 뒤르바흐(Fanny Dürbach) 덕분에 잘 알려져 있다. 뒤르바흐는 차이콥스키가 어린 나이에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읽었고, 시를 쓰는 등 굉장히 조숙했다고 기억한다. 재미있는 일화로, 어린 차이콥스키가 러시아 지도를 입 맞추고 나머지 유럽에는 침을 뱉었지만, 프랑스만은 손으로 덮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프랑스어를 잘해서 그랬던 걸까?

 

또, 피아노에서 오래 연주하고 나면 너무 긴장을 한 나머지 잠을 잘 수 없었던 적도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당시 그의 가족은 그가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얼마나 대단한 음악가가 될지는 몰랐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집에 기계식 오르간을 들여놨는데, 차이콥스키는 이 오르간에서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Don Giovanni)'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았다. 이 경험이 그가 모차르트를 숭배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어려운 일들도 많았다. 이사 때문에 안정된 생활을 잃고,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끝까지 음악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고, 결국 우리가 아는 위대한 작곡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모데스트는 차이콥스키의 환경이 그의 재능을 억압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뒤르바흐가 음악적이지 않다고 비판했고, 부모님의 음악적 배경도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사실 차이콥스키 가족은 음악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었고, 피오트르의 재능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다. 비록 그 재능이 얼마나 클지는 몰랐지만, 그들은 보트킨스크에서 가정교사와 오케스트리온(기계식 오르간)을 통해 차이콥스키의 음악적 능력을 지원했다. 피오트르는 이 오르간에서 들었던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Don Giovanni)"의 일부를 듣고 느꼈던 '성스로운 기쁨'이 모차르트를 숭배하게 된 이유라고 말했다.

 

환경이 성장에 있어 주된 영향을 받는 사람이 있다 하였던 게 사실이라 믿을 만큼 차이콥스키 유년기에 큰 영향을 받은 2 가지 사전이 있었다. 그건 바로 1850년 5월에 쌍둥이 형제가 태어난 남과 새 가정교사인 아나스타샤 페트로브나 페트로바(Anastasya Petrovna Petrova)의 만남이었다. 쌍둥이 형제가 태어났을 때, 차이콥스키는 '마치 천사가 땅에 내려온 것 같다'는 표현을 썼다. 그의 가정교사였던 아나스타샤에게는 1854년에 그의 초기 작곡들 중 남아있는 작품 중 제일 첫 음악인 '아나스타샤 왈츠(Anastasya Waltz)'를 헌정하였다.

 

쌍둥이가 태어난 지 세 달 후, 알렉산드라는 차이콥스키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데려갔다. 그는 처음에 광산학교에 입학할 예정이었지만, 결국 법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아직 학교에 들어가기에는 나이가 어려서, 그는 2년간 준비 과정을 거쳤다. 모데스트의 이야기에서, 이때 어린 나이에 차이콥스키가 어머니와의 이별을 맞이하였고, 이것이 그에게는 큰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차이콥스키는 1852년 8월부터 1859년 5월까지 법학교에 다녔다. 그의 청소년기를 법학교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 물론, 그의 학창 시절에 관한 이야기는 정확히 기록되고 남겨진 내용이 거의 없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가족과 떨어져 지낸 이 시기가 그에게는 자신의 정체성과 미래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하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추측하게 된다.

 

1859년 법학교를 졸업할 때 찍은 차이콥스키의 모습 [출처: 차이콥스키 리서치]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의 전문 음악 교육(1861-65)

차이콥스키가 전문적인 음악교육이 시작된 것은 1961년 가을 이론 수업이었다. 그는 법학교를 졸업 후 관직에서 있었지만, 음악을 공부하려는 열망이 커지고 있던 시기였다. 그의 첫 번째 음악 스승은 독일 교육 방식을 따르며 베토벤의 후기 스타일을 지지하는 귀화한 폴란드인인 니콜라이 자렘바(Nicolay Zaremba)였다. 공무원직에서 승진이 거부된 후, 차이콥스키는 1862년 여름에 러시아 음악 협회의 새로운 '음악 학교'에 입학 신청을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St Peterburg Conservatory)은 1862년 10월 8일, 러시아의 1000번째 생일에 문을 열었으며, 차이콥스키는 1965년 말에 졸업을 하였다.

 

이 시기에 차이콥스키의 동창생인 헤르만 라로슈(Herman Laroche)의 회고를 통해 음악원 시절의 차이콥스키에 대해 알 수 있다. 만약 라로슈와 차이콥스키의 가정교사였던 파니 뒤르바흐가 없었다면, 26세 이전의 차이콥스키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차이콥스키는 이론과 작곡뿐만 아니라 피아노, 플루트, 오르간을 음악원에서 배울 수 있었다. 그의 초기 작곡 스승으로는 안톤 루빈슈타인(Anton Rubinstein)으로, 그에게서 작품을 빠르게 쓰고 완성하며 매일 새로운 곡을 작업하는 것과 음악을 성스로운 소명으로 여기는 등 엄격한 규율을 강조했다. 같은 규율을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차이콥스키는 루빈슈타인의 작곡 스타일이나 인격적인 면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루빈슈타인이 차이콥스키의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작곡적 재능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비추어 보아 그의 작곡가로서의 자질과 인격을 알 수 있지 않나 싶다.

 

그의 음악원 시절에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성장하고 성숙한 음악 작품을 만들어 냈는가에 대해서는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음악인으로서의 천재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의 뛰어난 문학적 감수성과 연극에 대한 사랑이 그의 음악의 우아한 표현을 추구하며 상장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러시아 음악의 논쟁의 중심이자 두 개의 큰 분류인 민족적 음악과 범서구적 음악사상으로 분열시킨 시기였기 때문에, 그의 음악이 한층 더 빠르고 깊게 성숙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차이콥스키는 경험이 필요했을 뿐 작곡 기법에는 부족함이 없었으며, 음악원을 완전히 떠나 성숙한 작곡가로 거듭났다. 그의 동료 라로슈는 차이콥스키의 엄청난 재능을 예견하며 이렇게 예언하였다: '차이콥스키는 현시대 러시아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적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나는 그에게 우리 음악의 미래에 대한 가장 큰, 아니, 더 나아가 유일한 희망이다.'

 

1865년 가을 상테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의 모습 [출처: 차이콥스키 리서치]

 

차이콥스키, 모스크에서 피어난 예술혼과 인간미: 격동의 10년 (1866-76)

1866년, 차이콥스키는 모스크바로 향하며 새로운 삶의 장을 열었다. 차이콥스키의 모스크바 시절은 그야말로 격동의 10년이었다. 모스크바는 그에게 음악 천재로서의 싹을 틔우고,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예술적 영감을 얻으며 사회적 인맥을 넓히며, 동시에 인생의 깊이를 더해가는 공간으로, 내면의 고뇌와 갈등을 겪었던 시기였다.

 

그의 스승인 안톤 루빈슈타인의 동생인 니콜라이 루빈슈타인(Nikolay Rubinstein)은 모스크바에서 음악원을 설립하였고, 차이콥스키를 교수로 초청하여 활동하며 작곡가로서 입지를 다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이곳에서 차이콥스키는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 연극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폭넓은 인맥을 형성할 수 있었다.

 

특히, 니콜라이는 차이콥스키에게 그의 음악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오케스트라를 지원하였고, 표트르 위르겐손(Pyotr Jürgenson)은 그의 음악을 출판하며 재정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니콜라이 카슈킨(Nikolay Kashikin)은 루빈스타인이 음악 비평을 맡도록 권유한 음악원 교수로, 차이콥스키의 언론에서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으며, 중요한 회고록의 저자였습니다. 이러한 든든한 지원자들 덕분에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차이콥스키는 사회적 명성을 얻고, 자신의 젊음에 걸맞은 생활을 즐겼습니다. 루빈스타인이 공동 설립한 예술 클럽에서 그는 모스크바 문학과 연극의 수많은 엘리트들을 만났습니다. 한 친구, 클리멘코(Klimenko)는 공식적인 전기에서 언급되지 않은 차이콥스키의 익살스러운 모습을 회상하며, "그는 거리에서 모르는 사람들을 크게 환영하거나, 수도원에서 즉흥적으로 농담 가사를 짓고, 기차 안에서 글린카의 오페라 '황제에게 바친 목숨'의 마주르카를 춤추고 노래하는 등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보였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차이콥스키는 그의 생활과 환경에 불만을 가졌고, 작곡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싫어하였습니다. 5년 동안 그는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집에서 벗어나 조용한 곳을 찾아다녔다. 그 이유는, 차이콥스키가 지내던 집이 사실상 호텔처럼 운영되었고, 음악원 직원들이 모이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계속되는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번역과 편곡을 통해 수입을 보충해야 했다.

 

그는 교육에 대해 자신감이 부족했으며, 이로 인해 그의 과도한 요구와 이 요구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의 짜증, 그리고 여성 학생들을 가혹하게 대했다는 불만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차이콥스키는 두 권의 화성학 교재를 집필했으며, 그중 하나는 러시아 교회 음악에 맞게 조정되어 J.C. 로베의 '음악 교리문답서' (J.C. Lobe's Katechismus der Musik)로 번역되었습니다.